루이비통은 1854년에 시작된 아주 오래된 브랜드입니다. 왕실의 여행용 가방을 만들던 초창기 루이비통은 1977년 헨리 라크미에(Henri Racamier)가 회사를 이끌기 전까진 동네 상점이었습니다. 창립 후 1970년대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루이비통은 파리와 니스에 두 개 지점밖에 없었고, 자영업자에 가까웠습니다.
라크미에는 “럭셔리 브랜드”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사람입니다. 그 당시 럭셔리 제품은 왕실에게 납품하는 제품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일반 사람들은 비싸서 살 수도 없었기에), 라크미에는 1970년대 세계화의 물결을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살 수 있는 날이 오겠구나”
라크미에는 1977년 루이비통의 대표이사가 되고 1978년에 일본의 도쿄, 오사카에 루이비통 매장을 냅니다. 1984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에 루이비통 매장을 냅니다. 창업 후 125년동안 매장 2개에 불과했던 루이비통은 라크미에가 들어선 이후 13년만인 1990년까지 125개의 매장을 세계 각국에 열었습니다.
루이비통의 매출은 1977년 150억에서 1984년에 무려 1600억이 됩니다. 라크미에 집권 후 7년만에 10배이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라크미에는 이 기세를 몰아 루이비통을 1984년에 상장시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라크미에는 루이비통과 전혀 상관 없는 주류 회사인 모엣-헤네시의 대표 알랑 셰벌리어(Alain Chevalier)에게 연락을 받습니다.
“미국의 기업 사냥꾼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셰벌리에는 모엣이라는 샴페인 브랜드와 헤네시라는 코냑 브랜드를 인수합병하고 모엣-헤네시를 전세계적인 주류 기업으로 만든 영웅입니다. 그 역시 모엣-헤네시를 1980년대에 상장시켰는데, 미국의 기업 사냥꾼들이 주식 시장에서 모엣-헤네시의 지분을 야금 야금 사서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셰벌리에는 라크미에에게 루이비통 역시 미국 금융인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고 조언하면서 인수 합병을 제안합니다 (그 당시 모엣-헤네시 그룹이 루이비통 그룹보다 시가총액이 훨씬 높았습니다). 두 그룹이 합쳐지면 셰벌리에-라크미에 연합의 지분이 총 51%가 되기 때문에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지게 됩니다. 결국 1987년에 루이비통과 모엣-헤네시 그룹은 합병을 하고 기업 사냥꾼들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셰벌리에와 라크미에의 사이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서로 배신할 것을 걱정해 제 3자를 끌어들여 삼각 연합으로 회사를 소유하자고 합의합니다. 셰벌리에는 라크미에를 설득해 기네스를 끌어들입니다. 참고로 기네스는 그당시 LVMH 그룹보다도 더 큰 거대 기업이었습니다.
문제는 모엣-헤네시의 대표 셰벌리에와 기네스 대표와의 사이가 너무 좋았고, 두 그룹이 비즈니스적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잘 맞았다는 점입니다. 셰벌리에는 모엣-헤네시를 합병했던 것처럼 기네스와도 연합해 비즈니스를 확장할 생각이었습니다. 루이비통의 수장 라크미에 입장에서는 이 거대 주류 기업들이 LVMH 그룹을 장악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문제가 터집니다. 기네스는 LVMH 그룹의 지분 3.5%를 사들이기로 잠정 합의했는데, 기네스 대표가 돌연 20%를 사겠다고 얘기합니다. 라크미에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발언이었습니다. 라크미에는 생각합니다.
“나도 든든한 동맹군을 하나 끌어들여야겠다”
라크미에는 모엣-헤네시와 기네스가 주류 회사 연합을 형성한 것처럼 루이비통과 비슷한 럭셔리 제품을 만드는 큰 회사를 연합군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예상하셨나요? 당시 76세였던 라크미에는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30대 후반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연합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건 라크미에 인생의 최악의 실수가 되어 돌아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